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A. 역사 인물

조선의 능은 왜 갑자기 황제의 모습으로 바뀌었을까 - 고종·순종과 홍유릉

pfinder903 2026. 9. 3. 21:30

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 · A. 역사 인물 이야기 - 7

조선의 능은 왜 갑자기 황제의 모습으로 바뀌었을까 - 고종·순종과 홍유릉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경춘선 금곡역에서 걸어서 십 분 남짓한 자리에 다른 조선왕릉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의 능이 있다.  홍살문을 지나 능침으로 다가가는 길에 정자각 대신 우람한 침전이 서 있고, 참도 양옆으로는 기린과 코끼리, 사자, 해태 같은 낯선 동물 석상들이 도열해 있다.  조선의 왕과 왕비를 모신 마흔 곳 넘는 능 가운데 이런 모습을 한 곳은 이곳, 홍릉과 유릉뿐이다.

 

홍릉에는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과 명성황후가, 유릉에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과 두 황후가 잠들어 있다.  두 능을 합쳐 흔히 '홍유릉'이라 부른다.  왜 이 두 능만 조선왕릉의 전통적인 격식을 벗어나 있을까.  그 답은 능이 조성된 시점, 조선이라는 나라가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바꾸고, 다시 그 이름마저 지켜내지 못했던 격동의 수십 년 속에 있다.

 

 

조선의 능은 왜 갑자기 황제의 모습으로 바뀌었을까 - 고종·순종과 홍유릉
격동의 서사는 한 왕조가 무너지고 한 나라가 사라지는 과정이었다

 

 

 

스물두 살에 떠맡은 위태로운 왕좌

 

고종(1852~1919)은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63년, 열두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십 년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섭정하며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 등 강력한 개혁을 밀어 붙였지만, 1873년 친정을 선포한 뒤로는 고종이 직접 국정을 이끌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물려받은 나라는 안으로는 세도정치의 잔재와 재정난에, 밖으로는 일본과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에 시달리는 위태로운 처지였다.

 

 

 

궁궐 담장을 넘은 총성 — 을미사변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 낭인들과 군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명성황후는 청과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의 조선 침탈을 견제하려 했고, 일본은 이를 대륙 진출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여겼다.  시신은 궁궐 뒤편에서 불태워졌고, 왕비의 죽음은 오랫동안 국제사회에 온전히 알려지지도 못했다.  2년 뒤인 1897년에야 서울 청량리에 숙릉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안장되었다가, 1900년 지금의 남양주 금곡동 자리로 옮겨졌다.

 

 

 

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다 — 아관파천

 

왕비를 잃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 2월, 세자와 함께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왕이 자국 궁궐을 벗어나 외국 공관에 머무른 이례적인 사건으로, 그만큼 당시 왕실의 안전이 위태로웠음을 보여준다.  고종은 이곳에서 약 1년간 머물며 친일 내각을 해체하고 열강의 세력균형 속에서 재기를 모색했다.

 

 

 

"이제 이 나라는 황제의 나라다" — 대한제국 선포

 

1897년 2월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12일, 원구단(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왕이 아니라 황제, 제후국이 아니라 자주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 조선이 중국·일본과 대등한 지위에 있는 국가임을 선언하는 상징적 조치였다.  이 선포로 훗날 고종과 순종의 능이 조선 왕릉이 아니라 황제릉의 격식으로 조성되는 근거가 마련된다.

 

 

 

헤이그로 보낸 밀서, 그리고 끌어내려진 황제

 

대한제국의 자주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1904~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늑약(1905)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고종은 이에 맞서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상설·이위종 세 특사를 비밀리에 파견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려 했다.  그러나 특사단은 일본과 열강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서지도 못했고, 이 사건은 오히려 일본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는 빌미가 되었다.  1907년 7월, 고종은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즉위

 

고종의 뒤를 이어 황태자였던 순종(1874~1926)이 대한제국 제2대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순종에게는 실권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즉위 직후 한일신협약으로 행정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이 임명되었고, 대한제국의 군대는 강제 해산되었다.  1910년 8월 마침내 한일병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며 대한제국은 27대 519년을 이어온 왕조의 막을 내렸다.  순종이 조약 서명을 끝내 거부하자 총리대신 이완용이 대신 서명했다고 전한다.  이날 이후 순종은 '이왕(李王)'이라는 격하된 칭호로 창덕궁에 머물게 된다.

 

 

 

치마 속에 감춘 옥새 — 사실과 이야기 사이

 

병합 당일 순종의 황후였던 순정효황후가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다가, 친일 대신들이 옥새 날인을 강요하자 이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해진다.  나라를 잃는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했다는 이 일화는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왔지만, 당대 기록으로 뒷받침되지 않아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반론도 있다.  사실과 전설 사이에 걸쳐 있는 이야기인 셈이다.

 

 

 

상여 앞에서 터진 만세 — 고종의 인산일과 3·1운동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 머물던 고종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시신의 안색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소문이 퍼지며 일본인 또는 친일파에 의한 독살설이 빠르게 번졌다.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이 소문은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민족적 울분에 불을 붙였다.  고종의 국장(인산)이 3월 3일로 예정된 가운데, 이틀 앞선 3월 1일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3·1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총독부가 주관한 고종의 장례는 기존 국왕의 국장에 비해 절차가 축소된 채 치러졌지만, 그 죽음이 촉발한 만세의 물결은 축소되지 않았다.

 

 

 

십 년 뒤, 또 한 번 — 순종의 인산일과 6·10만세운동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창덕궁에서 승하했다.  나라를 잃은 마지막 황제의 죽음 앞에서 학생들과 시민들은 6월 10일 인산일에 맞춰 다시 한번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른바 6·10만세운동이다.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운동은 3·1운동만큼 전국적으로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식민지 조선의 저항이 꺾이지 않았음을 보여준 사건으로 기억된다.  순종의 능인 유릉은 이렇게 조성되어,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을 모신 마지막 왕릉이 되었다.

 

 

 

낙선재에서 보낸 마지막 반세기 — 순정효황후, 그리고 남은 사람들

 

순종이 세상을 떠난 뒤 순정효황후는 대비로 불리며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광복 후에도 곧바로 환궁하지 못하다가 1960년에야 낙선재로 돌아올 수 있었고, 이후 의친왕비·덕혜옹주 등과 함께 지내며 여생을 보냈다.  1966년 2월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유릉에 순종과 합장되며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장을 닫았다.  유릉은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 세 사람을 한 봉분 아래 각각의 방에 모신 '동봉삼실릉'으로, 조선왕릉을 통틀어 이곳에만 있는 독특한 형식이다.

 

 

 

가볼 수 있는 정보

 

위치: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금곡동). 경춘선 금곡역에서 도보로 이동 가능한 거리에 있다.

구성: 고종·명성황후의 홍릉, 순종과 두 황후의 유릉을 중심으로 영친왕 부부의 영원, 의친왕 부부의 묘, 덕혜옹주 묘 등 대한제국 황실

            가족의 묘역이 함께 자리한다.

지정 정보: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다른 조선왕릉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에 포함

            되었다.

관람 특징: 참도 양옆에 늘어선 기린·코끼리·사자·해치 등 이국적인 석수와, 정자각 대신 세워진 정면 5칸 침전이 대한제국 황제릉만의 볼거
            리다.  관람시간·휴무일·입장료는 계절과 정책에 따라 바뀔 수 있으므로, 방문 전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에서 확인하는

            것을 권한다.

관리 주체: 국가유산청 조선왕릉동부지구관리소.

 

 

 

글을 마치며 ...

 

고종과 순종, 두 황제가 잠든 홍유릉은 조선왕릉이면서 동시에 조선왕릉이 아닌 곳이다.  대한제국 선포로 왕이 황제가 되었기에, 능도 왕릉이 아닌 황제릉의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대한제국 선포와 강제 퇴위, 그리고 두 차례의 만세운동으로 이어진 이 격동의 서사는 한 왕조가 무너지고 한 나라가 사라지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남양주에 잠든 이 마지막 황제들의 능은 그래서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대한제국이라는 짧고 아픈 역사 그 자체를 보여주는 자리다.

 

다음 글에서는 남양주역사문화 여덟 번째 이야기, '남양주 실학박물관에서 만나는 조선 후기 지식인들'로 이어간다.  정약용의 사상적 뿌리였던 실학이 남양주라는 공간 안에서 어떻게 하나의 박물관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다루며, 역사 인물 이야기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참고 자료

•위키백과 — 홍유릉

•나무위키 — 홍유릉

•경기문화재연구원 — 남양주 홍릉과 유릉

•위키백과 — 순정효황후

•시사매거진 — 대한제국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홍릉'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 100년 전, 고종 황제의 국장 어떻게 진행됐을까

•경향신문 — [어제의 오늘] 1926년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