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C.근현대사

'남양주'라는 이름조차 없던 시절 — 일제강점기, 이 땅 사람들의 삶

pfinder903 2026. 9. 7. 15:50

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 · C. 근현대사 이야기 - 19

'남양주'라는 이름조차 없던 시절 — 일제강점기, 이 땅 사람들의 삶

 

 

 

지금 우리가 '남양주'라고 부르는 이 땅은, 100여 년 전에는 이런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정약용의 마재마을도, 세조가 잠든 광릉도, 지금의 남양주 어느 동네도 당시에는 모두 '양주군'이라는 훨씬 넓은 고을의 일부였다.  그 시절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나라를 잃은 채로 논밭을 갈았고, 철길을 놓았고, 어느 봄날에는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섰다.  지금까지 이 블로그가 다뤄온 조선시대 인물과 유적들의 이야기를 한 세기 뒤로 당겨오면, 바로 이 사람들의 이야기와 만나게 된다.

 

 

'남양주'라는 이름조차 없던 시절 — 일제강점기, 이 땅 사람들의 삶

 

 

 

그때는 '남양주'가 아니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부와 군, 면을 대대적으로 통폐합했다.  이때 지금의 남양주 일대를 포함한 양주군은 주내·회천·은현·광적·백석·시둔·별내·진접·진건·화도·와부·미금·구리·노해·이담·장흥까지 열여섯 개 면을 거느린 큰 고을로 재편되었다.  '남양주'라는 이름은 이보다 훨씬 뒤인 1980년 4월, 양주군에서 구리읍·미금읍·진접면·진건면·수동면·화도면·와부면 등이 분리되어 나오면서야 비로소 생겨난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의 이 땅 사람들에게 '남양주'라는 이름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의 지명이었던 셈이다.

 

 

 

만세 소리, 마을에서 마을로

 

1919년 3월,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의 물결은 곧 양주군 곳곳으로 번져 나갔다.  기록에 따르면 지금의 남양주 지역에서는 3월 13일 미금면 평내리에서 약 150명이 참여한 만세시위가 처음 일어났다.  헌병에 의해 곧 강제 해산되었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사흘 뒤인 3월 15일에는 와부면 송촌리에서, 조안리 등 인근 마을을 지나며 시위대가 500여 명까지 불어났다.  3월 24일 이후 진접면 광릉천변에서는 약 600여 명이 모였고, 3월 29일에는 진건면 오남리와 별내면에서 잇따라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열흘이 조금 넘는 사이, 지금의 남양주 전역이 차례로 만세운동의 물결에 휩싸인 셈이다.

 

 

 

화도면 마석우리, 가장 큰 함성

 

이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화도면 마석우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었다.  본래 3월 16일로 계획되었던 시위가 사전에 발각되자, 주민들은 이틀 뒤인 3월 18일 오히려 총궐기했다.  이달용의 권유로 시작된 시위는 헌병주재소 앞까지 번지며 참여 인원이 약 1천 명으로 불어났다.  당시 양주군 지역에서 벌어진 만세운동 가운데 단연 가장 큰 규모였다.

 

 

 

총소리 뒤에 남은 이름들

 

일본 헌병은 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현장에서 여러 명이 총격에 목숨을 잃었고, 훗날 이 사건으로 유상규·이교직·손복산·신영희 등 다섯 명이 순국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오랜 세월이 지나며 자료에 따라 사망자 수와 이름이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숫자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붙잡힌 사람들 중 김필규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은 뒤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그해 7월 옥중에서 순국했다.  이들은 훗날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등을 추서받았지만, 그 서훈은 목숨을 건 함성이 있고도 한참 뒤에야 뒤늦게 도착한 것이었다.

 

 

 

산사에서 벼려진 저항의 뜻

 

만세운동이 거리에서만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앞서 다룬 봉선사의 근대사에도 독립운동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  훗날 봉선사를 콘크리트 법당으로 재건하고 국내 사찰 최초로 한글 현판을 내걸었던 운허 스님은, 사실 그보다 앞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먼저 살았던 인물이다.  본명 이시열이었던 그는 1912년 만주로 건너가 대동청년단에 가입해 항일 활동을 시작했고, 3·1운동 이후에는 봉천에서 독립군계 신문 『한족신보』의 사장을 맡았으며, 1920년에는 광한단을 조직해 무장 항일 노선에도 발을 들였다.  1936년, 그는 봉선사에 강원을 세워 후진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총과 신문 대신 경전과 교육으로 방향을 튼 셈이었다.

 

 

 

 

철길과 논밭, 수탈의 그림자

 

일상의 풍경도 조용히, 그러나 크게 바뀌고 있었다.  앞선 글에서 다룬 경춘선은 1939년 이 지역을 관통하며 개통되었는데, 자원 수송이라는 목적을 두고 여러 해석이 엇갈리는 철도이기도 했다.  화천·청평 등지의 댐 건설 자재를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다는 지적처럼, 이 철길이 지역 주민의 편의만을 위해 놓인 것은 아니었다는 시각도 있다.  한편 전국적으로 시행된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은 조선 농촌의 토지 소유 구조와 쌀 생산 방식을 크게 뒤흔든 정책으로, 논농사가 중심이던 이 지역 농민들의 살림살이에도 크든 작든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다만 이 지역에 국한된 구체적인 통계나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전국적인 흐름 속에서 이 지역의 삶을 유추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해방, 그리고 새로운 이름을 얻기까지

 

1945년 광복을 맞은 뒤, 이 땅에는 다시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만주에서 돌아온 운허 스님은 1946년 4월 양주군에 광동중학교를 세우고 초대 교장을 맡아 교육 사업에 뛰어들었다.  총칼로 지키려 했던 나라를, 이번에는 교실에서 지켜내려 한 셈이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이 지역은 여전히 '양주군'이라는 이름 아래 있었고, 198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남양주'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하게 된다.

 

 

 

 

가볼 수 있는 정보

 

이 글에서 다룬 사건들은 특정 관람 시설보다는 지역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 있으므로, 아래 정보를 참고해 관련 장소를 함께 돌아보면 좋다.

  • 화도읍 일대: 옛 화도면 마석우리로, 1919년 3월 18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
  • 봉선사(18번째 글 참고): 운허 스님이 1936년 강원을 세우고 훗날 주지를 지낸 곳
  • 광동중·고등학교: 1946년 운허 스님이 설립한 학교, 교내에 운허역사기념관 조성
  • 관련 기록 확인: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서 화도 만세운동 관련 독립유공자 공적 조회 가능

 

 

 

 

글을 마치며

 

지금은 아파트와 전철역이 빼곡히 들어선 이 땅에서, 100여 년 전 사람들은 아직 있지도 않은 '남양주'라는 이름 대신 '양주군'이라는 이름으로 나라 잃은 시절을 살아냈다.  그들은 논밭을 갈고 철길을 놓는 일상 속에서도, 어느 봄날에는 거리로 나서 목숨을 걸고 만세를 불렀고, 어느 산사에서는 조용히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것으로 저항을 이어 갔다.  지금 이 지역 곳곳의 지명과 학교, 절 이름 속에는 그 시절의 흔적이 생각보다 가까이 남아 있다.

 

다음 글에서는 6·25전쟁 시기, 이 지역이 겪은 또 다른 시간을 들여다본다.

 

 

 

 

참고 자료

  • 구리남양주뉴스 — 남양주 3.1운동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남양주시(행정구역 연혁)
  • 위키백과 — 남양주시(1980년 분리 경위)
  •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 독립유공자 김필규 공적정보
  •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 독립유공자 강선원 공적정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용하(운허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