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 · B. 문화유산 탐방기 - 18
산사에 들렀는데 궁궐을 만나다 — 흥국사, 남양주에 남은 왕실의 원찰
수락산 자락, 남양주시 별내동에 자리한 흥국사에 들어서면 조금 낯선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여느 산사처럼 소박한 법당을 기대했다면 특히 그렇다. 지붕 위에는 궁궐에서나 볼 법한 잡상이 줄지어 앉아 있고, 경내 한켠에는 절집이라기보다 양반가 저택이나 서원 강당에 가까운 커다란 건물이 서 있다. 왜 산속의 절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
답은 이 절의 출발점에 있다. 흥국사는 처음부터 평범한 사찰이 아니라, 왕이 되지 못한 어느 아버지를 위해 지어진 원찰이었다. 그 사연을 따라가 보면 조선 후기 왕실이 이 작은 산사와 어떻게 인연을 맺어 왔는지가 드러난다.

임금이 되지 못한 아버지를 위하여
이야기는 15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14대 임금 선조는 중종의 후궁 소생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직계가 아닌 왕실 방계 출신으로는 처음 왕위에 오른 임금이었다. 그의 친아버지 덕흥군은 평생 왕자의 신분으로 살다 세상을 떠났고, 아들이 보위에 오른 뒤에야 덕흥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 왕이 되어 보지 못하고 떠난 아버지를 위해, 선조는 즉위 직후 명복을 비는 원당을 짓게 했다. 그것이 지금의 흥국사이며 당시 이름은 '흥덕사'였다.
이름을 바꾼 사연
흥덕사라는 이름은 60년 가까이 이어지다가 1626년, 인조 대에 이르러 바뀐다. 절을 다시 중건하면서 '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뜻을 담아 흥국사로 이름을 고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앞뒤로 겪으며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던 시절, 왕실의 원찰에 이런 이름을 붙인 데에는 국운을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왕실의 안녕을 빌던 절
흥국사와 왕실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790년, 정조 14년에 이 절은 '오규정소'로 지정되었다. 오규정소란 관리가 상주하며 왕실의 무사함을 비는 역할을 하던 사찰을 가리킨다. 창건 이후 200년이 넘도록 흥국사가 개인의 신앙처가 아니라 나라가 직접 관리하고 후원하는 공간으로 자리 매김해 왔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궁궐 지붕 위의 잡상, 산속 절집에 앉다
왕실 원찰이라는 지위는 건축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대웅보전과 영산전, 만월보전 등 흥국사의 주요 전각 지붕에는 잡상, 즉 궁궐 건물에서 잡귀를 막기 위해 처마 끝에 세우는 작은 장식 기와가 올라가 있다. 잡상은 원래 궁궐이나 이에 준하는 왕실 관련 건축물에만 허용되던 요소로, 일반 사찰 법당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흥국사의 지붕을 유심히 올려다보면, 이 절이 그냥 산사가 아니라 왕실과 직접 닿아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건축 스스로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1878년, 또 하나의 궁궐 같은 건물
흥국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물은 '대방'이다. 근대기인 1878년 무렵 지어진 이 건물은 높이 쌓은 기단 위에 웅장하게 들어앉아, 언뜻 보면 법당이라기보다 사대부가의 고택이나 서원의 강당처럼 보인다. 내부 구성도 독특하다. 염불 수행 공간과 누마루, 승려들이 머무는 승방, 부엌까지 한 건물 안에 통합해 놓은 '복합 법당' 형식으로, 대웅전을 실질적이고 상징적인 중심으로 삼아 설계되었다. 전통적인 사찰 건축 문법에서 한 걸음 벗어나 있으면서도 기능적인 이 건물은, 오늘날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근대 사찰 건축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흥선대원군의 붓글씨가 남은 자리
흥국사와 왕실의 인연은 조선 말기까지 이어진다. 대방에 걸린 편액과 만월보전 외벽의 주련, 영산전의 주련 등 여러 글씨가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전해진다. 고종의 아버지로서 한 시대를 호령했던 그가 어느 산사의 현판과 기둥 글씨를 직접 남겼다는 사실은, 이 절이 조선 후기까지도 왕실과 가까운 자리를 지키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덕릉이라는 이름의 흔적
흥국사가 자리한 이 일대에는 지금도 왕실의 흔적이 지명으로 남아 있다. 서울 상계동에서 고개를 넘어 남양주시 별내동으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덕흥대원군의 묘,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덕릉'이 있다. 왕이 아니었던 만큼 정식 능호는 아니지만, 그 이름이 그대로 주변 지명에 스며들어 이 고개는 지금도 '덕릉고개'로 불리고, 고개 아래로 이어지는 큰길에는 '덕릉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흥국사의 주소 역시 이 덕릉로에서 갈라져 나온 길 위에 있다. 흥국사는 이 덕릉을 관리하며 제사 음식을 마련하던 원찰, 이른바 조포사 역할도 함께 맡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덕릉고개라는 이름을 두고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선조가 아버지를 정식 왕으로 추존하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하다, 고갯길 숯장수들에게 은밀히 사례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덕릉에서 왔다'고 말하도록 했고, 그 말이 오가는 사이 자연스럽게 고개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정사에 남은 기록이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야담이니,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 고개와 흥국사를 둘러싼 왕실의 애틋한 사연이 후대에 이렇게도 각색되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여러 전각들, 겹겹이 쌓인 시간
지금의 흥국사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영산전, 대방 외에도 시왕전·독성전·나한전·범종각과 삼층석탑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한 시기에 한꺼번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 중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중수와 증축을 거치며 조금씩 늘어난 결과다. 그래서 흥국사를 걷는다는 것은 곧 400년 넘는 세월 동안 이 절에 쌓인 여러 겹의 시간을 함께 걷는 일이기도 하다.
수락산 자락, 지금의 흥국사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울 노원구와 맞닿아 있어 도심에서도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편이며, 영산전 옆 계단을 오르면 수락산 등산로로 바로 이어져 등산과 답사를 함께 즐기려는 발걸음도 적지 않다. 왕실이 세우고, 여러 임금과 대원군의 손길이 더해지며 이어져 온 이 절은, 지금은 등산객과 나들이객을 두루 맞이하는 조용한 산사로 남아 있다.
.
가볼 수 있는 정보
정확한 관람 시간과 사찰 행사 일정은 계절과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방문 전 사찰에 문의하는 것을 권한다.
- 위치: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덕릉로1071번길 58 일원(수락산 자락)
- 특징: 대웅보전·영산전·만월보전 등 주요 전각과 대방(국가등록문화유산) 등 문화재 다수
- 찾아가는 길: 일주문에서 경내까지 도보 약 5분
- 연계 코스: 영산전 옆 계단을 통해 수락산 등산로로 진입 가능
- 문의: 흥국사(지역번호 031-590-2114)
글을 마치며
흥국사는 겉으로는 산속에 자리한 조용한 절이지만, 그 안에는 왕이 되지 못한 아버지를 위한 아들의 마음, 국운을 다시 일으키려던 바람, 그리고 왕실 어른의 붓글씨까지 여러 겹의 이야기가 쌓여 있다. 지붕 위 잡상 하나, 대방이라는 건물 하나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는 남양주의 근현대로 시선을 옮겨, 경춘선 철도가 이 지역에 남긴 흔적을 따라가 본다.
참고 자료
- 지지씨(경기문화재단) — 산사에 들렀는데 궁궐을 보고 왔네, 남양주 흥국사
- 경기역사문화유산원 — 남양주 흥국사 대방
- 국가유산포털 —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남양주 흥국사 영산전
- 국가유산포털 — 국가등록문화유산 남양주 흥국사 대방
- 위키백과 — 흥국사 (남양주시) (교차 확인용)
- 우리문화신문 — '덕릉'이라고도 부르는 덕흥대원군 무덤
'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 > B. 문화유적 탐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나라가 지어준 집, 반세기 동안 두 예술가가 지켜낸 집 — 남양주 궁집 (0) | 2026.09.07 |
|---|---|
|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남편과 떨어져 잠들다 — 사릉 답사기 (0) | 2026.09.07 |
| 대한제국 황제릉을 걷다 - 홍유릉 (0) | 2026.09.05 |
| 나루터가 정원이 되기까지 - 다산생태공원과 물의정원 (0) | 2026.09.05 |
| 선교사 없이 피어난 믿음 - 마재성지 순례기, 조용히 걷는 신앙의 길 (0) | 2026.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