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B. 문화유적 탐방

왕의 위패를 지키러 세운 절, 현판은 한글로 걸렸다— 세조의 원찰, 봉선사

pfinder903 2026. 9. 4. 20:42

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 · B. 문화유산 탐방기 - 11

왕의 위패를 지키러 세운 절, 현판은 한글로 걸렸다— 세조의 원찰,  봉선사

 

 

지난 이야기에서는 세조의 능인 광릉을 550년 동안 지켜 온 숲, 광릉숲과 국립수목원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 숲 초입, 능보다 먼저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자리에 절 하나가 있습니다.  언뜻 보면 여느 산사와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대웅전 자리에 걸린 현판 앞에 서면 누구나 잠시 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한자도 아니고 흘림체 붓글씨도 아닌, 또박또박한 한글로 "큰법당"이라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 절만 유독 한글로 현판을 달았을까요. 그 답을 찾아가려면 시간을 천 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절의 이름 자체가 임금의 뜻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함께 만나게 됩니다.  세조·광릉 이야기, 광릉숲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는 그 숲이 지켜 온 또 하나의 자리, 봉선사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세조의 원찰, 봉선사

 

 

 

천 년 전, 운악산 자락의 작은 절

 

봉선사의 뿌리는 고려 광종 20년인 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대의 고승 법인국사 탄문이 운악산 자락에 절을 짓고 '운악사(雲岳寺)'라 이름 붙였습니다.  이후 500년 가까이 이 절이 어떤 모습으로 이어져 왔는지는 기록이 많지 않습니다.  운악사의 이름이 다시 역사 앞에 또렷이 등장하는 것은 조선 초, 한 임금의 죽음을 계기로 해서 입니다.

 

 

 

세조의 능이 이 산자락에 자리 잡다

 

1468년 세조가 승하하자, 그의 능은 지금의 남양주 진접읍 운악산 자락에 조성되어 '광릉'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능호를 태릉으로 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당 현종·양귀비의 고사를 이유로 신숙주가 반대해 광릉으로 정해졌다는 사연은 앞서 세조와 광릉 이야기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능을 조성하고 관리를 주도한 이는 세조의 비, 정희왕후였습니다.  그리고 정희왕후의 다음 결정이 운악사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선왕을 받든다는 뜻, 봉선사

 

1469년, 세조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이자 예종 1년, 정희왕후는 광릉 곁의 운악사를 헐고 89칸 규모로 크게 새로 지었습니다.  그리고 절의 이름을 '봉선사(奉先寺)'로 바꾸었습니다.  '봉선'이란 선왕을 받든다는 뜻으로, 세조의 명복을 빌고 능을 수호하는 절이라는 성격을 이름에 그대로 담은 것입니다.  예종은 이 절에 친필 현판을 하사했다고 전해지는데, 오백 년 뒤 이 절이 다시 임금이 아닌 한글로 현판을 새로 달게 될 줄은 당시엔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능침사찰이라는 낯선 이름의 자리

 

봉선사처럼 왕릉 곁에 세워져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올리며 선왕의 명복을 비는 절을 '능침사찰(陵寢寺刹)' 또는 원찰이라 부릅니다.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에서도 왕실의 안녕과 조상 숭배를 위한 불교 신앙은 은밀히, 때로는 공공연히 이어졌고, 광릉의 봉선사, 훗날 다뤄질 정릉의 봉은사 등이 대표적인 능침사찰입니다.  겉으로는 유교 국가였지만 왕실 여인들의 신앙 공간으로서 절이 갖는 자리는 조선 내내 사라지지 않았던 셈입니다.

 

 

 

교종의 으뜸 사찰이 되다

 

봉선사의 위상이 가장 높았던 때는 명종 5년인 1550년 무렵입니다.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 정책으로 폐지되었던 선교양종 체제가 부활하면서, 봉선사는 교종의 수사찰로, 봉은사는 선종의 수사찰로 각각 지정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봉선사는 전국의 승려와 신도에 대한 교학 진흥을 이끄는 중추 기관이 되었고, 승려를 뽑는 국가 시험인 승과도 이 무렵 함께 시행되었습니다.  서산대사 휴정을 비롯한 이름난 고승들이 이 시기 승과를 통해 배출되었습니다.

 

 

 

두 번의 전쟁, 두 번의 잿더미

 

번성하던 봉선사에도 시련이 이어졌습니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절이 불에 타 사라졌고, 전쟁이 끝난 뒤인 1593년 낭혜 스님이 다시 세웠습니다.  그러나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병자호란으로 또 한 번 피해를 입었고, 1637년 계민 스님이 재차 중창을 이끌었습니다. 왕실의 원찰이라는 격조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봉선사의 역사는 전쟁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려야 했던 인고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근대의 중흥, 그리고 또 한 번의 전소

 

일제강점기에도 봉선사는 꾸준히 명맥을 이었습니다.  홍월초 주지가 1914년과 1926년 두 차례에 걸쳐 전각을 중수하고, 젊은 승려를 가르치는 강원을 설립했습니다. 이 무렵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태허 스님, 그리고 뒤에서 다시 만나게 될 운허 스님 등 항일 독립운동에 몸담은 인사들이 이 절을 근거지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51년, 한국전쟁이 봉선사를 또다시 덮쳤습니다. 큰법당을 포함해 14동 150칸에 이르는 건물이 한꺼번에 불에 타 사라졌습니다.

 

 

 

폐허 위에, 이번엔 콘크리트로

 

전쟁이 남긴 폐허 위에서 봉선사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이는 운허 스님이었습니다.  1969년부터 1970년에 걸쳐 큰법당을 새로 지었는데, 목조가 아니라 철근콘크리트 구조를 택했습니다.  이 법당은 훗날 국내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구조 법당으로 꼽히며 2012년 국가등록문화재 제522호로 지정됩니다.  임진왜란·병자호란·한국전쟁까지 거듭 불길에 스러졌던 목조 법당의 역사를 돌아보면, 화재에 강한 재료를 택한 결정이 그 아픈 경험과 무관하지 않았으리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절집 첫 한글 현판

 

큰법당을 다시 세운 운허 스님(1892~1980)은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인물이자, 광복 후에는 불교 경전을 한글로 옮기는 일에 평생을 바친 학승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사전을 편찬한 것도 그였습니다.  새 법당을 세우며 그는 현판 만큼은 한자가 아닌 한글로 달기로 했습니다.  1970년, 서예가 운봉 금인석에게 부탁해 완성된 '큰법당' 현판은 우리나라 사찰 법당 가운데 최초의 한글 현판으로 기록됩니다.  기둥에 걸린 주련까지 모두 한글로 옮겨, 한자를 모르는 이도 그 뜻을 그대로 읽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운허 스님은 소설가 춘원 이광수와 동갑내기 8촌 친척이었는데, 광복 후 이광수가 곤경에 처했을 때 인근 사릉 마을에 거처를 마련해 준 인연도 전해집니다.

 

 

 

가볼 수 있는 정보

 

  • 위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봉선사길 32 (부평리)
  • 대중교통: 수도권전철 4호선 진접역에서 21번 버스로 약 20분, 또는 경춘선 오남역에서 2·2-2번 버스로 약 30분 소요됩니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광릉·국립수목원 이정표를 따라가면 어렵지 않게 진입로를 찾을 수 있습니다.
  • 관람시간·입장료: 별도의 개방 시간 제한 없이 상시 개방하며 연중무휴이고, 입장료는 무료입니다.  다만 사찰 사정에 따라 바뀔 수 있으니 방문 전 공식 홈페이지(bongsunsa.net)나 전화(031-527-1951)로 확인하는 것을 권합니다.
  • 둘러볼 곳: 일주문을 지나면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새겨진 하마비를 만나게 됩니다.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말과 가마에서 내리라는 뜻으로, 이 절이 왕실의 원찰임을 보여주는 상징물입니다.  그 안쪽으로 500년 넘은 느티나무와 부도밭을 지나면 1층은 사천왕문, 2층은 설법당을 겸하는 청풍루가 나오고, 이를 통과하면 큰법당 마당에 이릅니다.  큰법당 안에는 보물 제397호 봉선사 동종과 보물 제1792호 비로자나삼신괘불도가 모셔져 있습니다.  경내 연못가에는 매년 여름 연꽃축제가 열리는 연꽃단지가 조성되어 있어, 계절에 따라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 함께 보면 좋은 곳: 세조와 광릉(A05), 광릉숲과 국립수목원(No.10)이 도보나 짧은 차량 이동 거리 안에 있어, 봉선사와 함께 하루 코스로 묶어 다녀오기 좋습니다.

 

 

 

글을 마치며

 

969년 운악산 자락의 작은 절에서 시작해, 임금의 뜻으로 새 이름을 얻고, 한 시대 교종을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다가, 전쟁을 거듭 겪으며 잿더미가 되기를 반복하고, 끝내 콘크리트와 한글이라는 낯선 재료·문자로 다시 태어난 절.  봉선사의 천 년은 화려한 승리의 기록이라기보다, 무너질 때마다 다시 일어선 사람들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큰법당 앞에 서서 한글 현판을 올려다볼 때, 그 글자 하나하나에 이런 사연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나면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광릉숲 자락을 벗어나, 남양주 곳곳에 남아 있는 또 다른 문화유적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참고 자료

 

디지털남양주문화대전 — 봉선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운악산 봉선사

위키백과 — 봉선사

나무위키 — 봉선사

불교언론 코리아(koya-culture) — 절 법당 첫 한글 현판, 봉선사 '큰법당'

헤럴드경제 — 연꽃향 그윽한 절집…세조(광릉) 받드는 남양주 봉선사(奉先寺)

오마이뉴스 — 조카를 살해한 세조의 능침에서 발견한 미묘한 풍경

여행을 말하다(telltrip) — 콘크리트로 지은 국내 최초 법당, 이유가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