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 30

기차가 지나간 자리, 마을이 달라졌다 — 경춘선과 함께 변한 남양주

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 · C. 근현대사 이야기 - 19기차가 지나간 자리, 마을이 달라졌다 — 경춘선과 함께 변한 남양주 남양주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경춘선 철길에는 별내, 퇴계원, 사릉, 금곡, 평내호평, 천마산, 마석까지 일곱 개의 역이 있다. 지금은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평범한 전철 노선이지만, 이 철길이 놓인 지 이제 90년 가까이 되었다. 그 사이 남양주의 여러 마을은 이 철길을 따라 생기고, 자라고, 때로는 모습을 완전히 바꾸었다. 기차가 지나가야 도청을 지킨다? 경춘선의 탄생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따라붙는다. 조선총독부가 강원도청을 춘천에서 철원으로 옮기려 하자, 이에 반발한 춘천 지역 유지 12명이 1936년 직접 경춘철도주식회사를 세워 철도를 놓았..

'남양주'라는 이름조차 없던 시절 — 일제강점기, 이 땅 사람들의 삶

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 · C. 근현대사 이야기 - 19'남양주'라는 이름조차 없던 시절 — 일제강점기, 이 땅 사람들의 삶 지금 우리가 '남양주'라고 부르는 이 땅은, 100여 년 전에는 이런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정약용의 마재마을도, 세조가 잠든 광릉도, 지금의 남양주 어느 동네도 당시에는 모두 '양주군'이라는 훨씬 넓은 고을의 일부였다. 그 시절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나라를 잃은 채로 논밭을 갈았고, 철길을 놓았고, 어느 봄날에는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섰다. 지금까지 이 블로그가 다뤄온 조선시대 인물과 유적들의 이야기를 한 세기 뒤로 당겨오면, 바로 이 사람들의 이야기와 만나게 된다. 그때는 '남양주'가 아니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부와 군, 면을 대대적으로 통폐합..

산사에 들렀는데 궁궐을 만나다 — 흥국사, 남양주에 남은 왕실의 원찰

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 · B. 문화유산 탐방기 - 18산사에 들렀는데 궁궐을 만나다 — 흥국사, 남양주에 남은 왕실의 원찰 수락산 자락, 남양주시 별내동에 자리한 흥국사에 들어서면 조금 낯선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여느 산사처럼 소박한 법당을 기대했다면 특히 그렇다. 지붕 위에는 궁궐에서나 볼 법한 잡상이 줄지어 앉아 있고, 경내 한켠에는 절집이라기보다 양반가 저택이나 서원 강당에 가까운 커다란 건물이 서 있다. 왜 산속의 절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 답은 이 절의 출발점에 있다. 흥국사는 처음부터 평범한 사찰이 아니라, 왕이 되지 못한 어느 아버지를 위해 지어진 원찰이었다. 그 사연을 따라가 보면 조선 후기 왕실이 이 작은 산사와 어떻게 인연을 맺어 왔는지가 드러난다. 임금..

나라가 지어준 집, 반세기 동안 두 예술가가 지켜낸 집 — 남양주 궁집

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 · B. 문화유산 탐방기 - 17나라가 지어준 집, 반세기 동안 두 예술가가 지켜낸 집 — 남양주 궁집 남양주시 삼패동, 아파트 단지와 도로 사이에 담장 높은 기와집 한 채가 있다.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궁집'. 누구의 집이었느냐고 물으면, 답은 더 흥미로워진다. 조선의 임금이 직접 나라의 재목과 목수를 보내 지어준 집이라는 것이다. 궁궐도 아니고 대군의 저택도 아닌, 한 옹주가 시집가서 살 집을 나라가 직접 지어주었다니 — 왜 그랬을까. 그런데 이 집의 사연은 조선시대에서 끝나지 않는다. 20세기 후반 한 예술가 부부가 사재를 털어 이 집을 지켜냈고, 21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대중에게 문을 열었다. 26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이 집을 스쳐 간 사람들의 이..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남편과 떨어져 잠들다 — 사릉 답사기

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 · B. 문화유산 탐방기 - 16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남편과 떨어져 잠들다 — 사릉 답사기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아파트 단지들 사이로 야트막한 능선 하나가 솟아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짓말처럼 조용해진다. 이곳이 사릉(思陵), 단종의 왕비였던 정순왕후 송씨가 잠든 자리다. 그런데 조선왕릉을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조선의 왕릉은 대부분 왕과 왕비가 나란히, 혹은 가까운 언덕을 사이에 두고 함께 묻혀 있다. 그런데 정순왕후의 남편인 단종은 서울에서 자동차로 두세 시간 걸리는 강원도 영월, 장릉에 홀로 있다. 부부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 묻힌 조선왕릉은 이 한 쌍이 유일하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 답은 사릉이라는 공간 자체에..

대한제국 황제릉을 걷다 - 홍유릉

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 · B. 문화유산 탐방기 - 15대한제국 황제릉을 걷다 - 홍유릉 남양주 금곡동, 경춘선 금곡역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조선 왕릉치고는 낯선 풍경의 능이 있다. 다른 능에서는 본 적 없는 정면 5칸짜리 커다란 건물이 능 앞을 지키고, 참도 양옆으로는 코끼리와 낙타 석상이 줄지어 서 있다. 앞서 이 블로그에서는 고종과 순종, 그리고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세워지고 무너져 갔는지를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그 이야기의 무대였던 홍유릉이라는 공간 자체를 실제로 걸으며 살펴보려 한다. 왜 이 능은 조선의 다른 마흔 두 기 왕릉과 이렇게 다르게 생겼을까. 그리고 홍릉과 유릉 말고도, 이 넓은 능역 안에는 또 누가 잠들어 있을까. 능이라기보다, 하나의 왕실 마을이다 ..

나루터가 정원이 되기까지 - 다산생태공원과 물의정원

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 · B. 문화유산 탐방기 - 14나루터가 정원이 되기까지 - 다산생태공원과 물의정원 남양주 조안면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두 개의 이름을 가진 정원을 만나게 된다. 하나는 조선의 실학자 이름을 딴 '다산생태공원', 다른 하나는 그저 '물의정원'이라는 소박한 이름이다. 그런데 정작 지도를 펼쳐 놓고 찾아보면, 정말로 유명한 지명인 '두물머리'는 이 두 공원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난다는 그 유명한 두물머리는 사실 남양주가 아니라 강 건너 양평군 땅에 있다. 그렇다면 다산생태공원과 물의정원은 왜 늘 '두물머리 근처'라는 수식어로 소개되는 걸까. 그리고 이 두 정원은 원래부터 이런 산책로와 꽃밭의 모습이었을까. 답을 찾아 강변을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선교사 없이 피어난 믿음 - 마재성지 순례기, 조용히 걷는 신앙의 길

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 · B. 문화유산 탐방기 - 13선교사 없이 피어난 믿음 - 마재성지 순례기, 조용히 걷는 신앙의 길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를 따라 마을 골목으로 접어들면 승용차 열댓 대가 겨우 들어설 좁은 주차장과 마주친다. 그 뒤로 보이는 것은 화려한 첨탑이 아니라, 기와지붕을 얹은 나지막한 한옥 한 채다. 이곳이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이라 불리는 마재성지, 정확한 이름으로는 '성가정 마재성지'다. 능내리 두물머리 인근, 정약용 유적지에서 걸어서도 갈 만한 거리에 있는 이 작은 마을이 왜 전국에서 순례객을 불러 모으는지는 골목 끝에 다 다라서야 알게 된다. 로마에서 사제 한 명 건너오기도 전에, 이 마을의 몇몇 선비들이 책을 구해 읽고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

동방 제일의 전망이라 불린 사연 - 운길산 수종사와 두물머리

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 · B. 문화유산 탐방기 - 12동방 제일의 전망이라 불린 사연 - 운길산 수종사와 두물머리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 같다.” 조선의 한 임금이 한밤중에 들었다는 이 소리 하나가,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절의 이름을 만들었다. 남양주시 조안면, 운길산 8부 능선에 자리한 수종사(水鐘寺)는 이름부터 물(水)과 쇠북(鐘)을 함께 품고 있다. 왜 산속 절 이름에 ‘물’과 ‘종’이 나란히 붙었을까? 그 답은 세조가 겪었다는 하룻밤의 이야기 속에 있다.다만 이 전설이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부터 이야기인지는 뒤에 다른 글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이 절이 품고 있는 다른 이야기들 - 조선 왕실이 발원한 탑들, 다산 정약용이 사랑한 풍경, 그리고 지금도 두물머리를 ..

왕의 위패를 지키러 세운 절, 현판은 한글로 걸렸다— 세조의 원찰, 봉선사

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 · B. 문화유산 탐방기 - 11왕의 위패를 지키러 세운 절, 현판은 한글로 걸렸다— 세조의 원찰, 봉선사 지난 이야기에서는 세조의 능인 광릉을 550년 동안 지켜 온 숲, 광릉숲과 국립수목원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 숲 초입, 능보다 먼저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자리에 절 하나가 있습니다. 언뜻 보면 여느 산사와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대웅전 자리에 걸린 현판 앞에 서면 누구나 잠시 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한자도 아니고 흘림체 붓글씨도 아닌, 또박또박한 한글로 "큰법당"이라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 절만 유독 한글로 현판을 달았을까요. 그 답을 찾아가려면 시간을 천 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절의 이름 자체가 임금의 뜻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