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 · A. 역사 인물 이야기 - 3
형제의 이름으로 순교하다 — 정약종과 마재성지
남양주시 조안면, 팔당호를 곁에 낀 작은 마을 마재에 가면 여느 성당과는 사뭇 다른 성당 하나를 만나게 된다. 콘크리트와 첨탑 대신 기와지붕을 얹은 한옥 성당, 그리고 마당에 서 있는 예수상과 성모상은 놀랍게도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있다. 이름도 낯설다, '거룩한 부르심의 땅 성가정 마재성지'. 어째서 이 조용한 강마을에, 그것도 한옥으로 지은 성지가 자리하게 되었을까.
답은 다산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丁若鍾)에게 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여유당에서 태어난 정약용과,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남긴 둘째 형 정약전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았다. 그런데 이 형제들 가운데 유독 한 사람만이 신앙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그가 바로 정약종이다. 이번 글에서는 마재마을이 어떻게 "한국 천주교의 뿌리이자 요람"이라 불리게 되었는지, 그 중심에 선 정약종의 삶과 순교, 그리고 그 후손들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역사적 배경 - 가장 늦게, 가장 뜨겁게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 정약종
정약종은 1760년, 진주목사를 지낸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위로 이복형 정약현, 그리고 정약전이 있었고 아래로는 훗날 실학을 집대성하는 정약용이 있었다. 네 형제 가운데 천주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인 사람이 정약종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단 신앙을 받아들이자 그 누구보다 뜨겁고 흔들림 없는 신자가 되었다.
디지털남양주문화대전과 여러 교회사 자료에 따르면, 정약종은 1786년 무렵 둘째 형 정약전의 권유로 세례를 받고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형제들이 대개 신앙과 유학적 처세 사이에서 거리를 조절해 나간 것과 달리, 정약종은 점점 더 깊이 교리 연구와 신앙 실천으로 파고들었다. 일부 기록에는 형제들이 천진암에서 열린 강학회에 참여하며 서학을 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나, 이 강학회의 구체적 실체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이견이 있어 사실과 전승을 구분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조선 최초의 평신도 신학자, 그리고 주교요지(主敎要旨)
정약종의 신앙 활동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대목은 그가 단순한 신자를 넘어 조직가이자 저술가였다는 점이다. 1795년에는 이승훈 등과 함께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신부를 조선으로 맞아들이는 데 관여했고, 1799년 무렵에는 서울 지역 평신도 조직인 명도회(明道會)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 명도회는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역할을 한, 조선 천주교 최초의 평신도 조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는 또한 《주교요지(主敎要旨)》 상·하권을 직접 저술했다. 이 책은 한문을 모르는 부녀자와 서민, 어린아이도 읽을 수 있도록 순 한글로 풀어쓴 교리 해설서였다. 양반 사대부의 언어인 한문이 아니라 백성의 글로 신앙을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정약종은 신분과 성별을 넘어선 신앙 공동체를 꿈꾼 인물로 평가받는다. 유학자들의 거센 비판에 맞서 교리를 논리적으로 방어하려 한 목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신유박해와 서소문 밖의 죽음
1800년 정조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정치 지형은 천주교에 적대적인 노론 벽파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이듬해인 1801년, 조선 천주교사에서 가장 참혹한 박해로 꼽히는 신유박해가 시작된다. 이 박해로 이승훈, 최필공, 최창현 등 수많은 신자와 성직자가 처형되었고,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를 거쳐 전라도 강진으로, 정약전은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정약종은 형제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신자들의 문서와 성물을 숨기려 애쓰다가, 훗날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알려지는 사건의 발단이 되는 교회 문서(성교전서)를 조카사위 황사영의 집으로 옮기던 중 관헌에게 발각되고 만다. 1801년 음력 2월 11일 체포된 그는 끝내 배교를 거부했고, 같은 해 음력 2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이승훈, 최창현 등과 함께 참수되었다. 이때 큰아들 정철상(가롤로) 역시 아버지와 함께 순교의 길을 걸었다.
한 집안에서 형제는 유배지로, 아버지와 아들은 형장으로 갈라진 셈이다. 정약용이 강진 유배지에서 열여덟 해에 걸쳐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써 내려가는 동안, 셋째 형 정약종의 이름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여기서 잠시 짚어둘 것이 정약종의 체포와 직결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정약종의 조카사위였던 황사영은 신유박해의 참상을 알리고 조선 교회를 구원해 달라는 내용의 밀서를 비단에 적어 북경의 프랑스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었다. 이 백서에는 서양 군대를 동원해 조선에 압력을 가해 달라는 대목까지 담겨 있어, 발각 이후 조정은 천주교를 국가 안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규정하고 탄압의 강도를 한층 더 높였다. 정약종이 옮기려던 교회 문서와 황사영의 백서는 별개의 사건이었지만, 두 사건이 거의 동시에 얽히면서 정약종 일가에 대한 조정의 시선은 더욱 냉혹해질 수밖에 없었다. 학계에서는 황사영 백서가 실제로 조선 조정에 어느 정도의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두고도 다양한 해석이 있어, 이 부분 역시 사실 관계를 단정하기보다는 여러 기록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를 이은 순교, 그리고 성가정 성지
이야기는 정약종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부인 유조이(체칠리아)와 어린 자녀들은 신유박해 당시에는 목숨을 건졌지만, 훗날 아들 정하상(바오로)은 조선 교회 재건에 헌신하는 인물로 성장했고, 딸 정정혜(엘리사벳)와 함께 1839년 기해박해 때 결국 순교했다. 정하상은 조선 교회의 실질적 지도자로서 헌종에게 천주교를 변호하는 상소 '상재상서'를 올린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정약종의 직계 가족 가운데 정약종 본인과 아들 정철상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 포함되어 복자품에 올랐고, 부인 유조이와 아들 정하상, 딸 정정혜는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 성인품에 올랐다. 한 가정에서 성인 3명과 복자 2명이 나온 사례는 세계 가톨릭교회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천주교 의정부교구는 2017년 마재를 '성가정 성지'로 선포했다. 선포 당시 교구장 이기헌 주교는 "온 가족이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하고 성가정을 이룬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며,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은혜를 누리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성당을 한옥으로, 성상을 한복 차림으로 조성한 것도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의 말과 글로 신앙을 살아낸 정약종 일가의 삶을 기리기 위함이라고 전해진다.
마재는 흔히 "선교사 없이 평신도 스스로 신앙을 일으킨 곳"으로 소개된다. 조선 천주교는 세계 교회사에서 드물게, 외국 선교사의 파견이 아니라 실학과 서학을 탐구하던 조선의 지식인들 스스로가 교리를 받아들이고 공동체를 조직하며 시작되었다. 그 자생적 신앙 태동의 한가운데 마재가 있었고, 그 중심에 정약종이 있었다.
가볼 수 있는 정보
[위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정식 명칭 '거룩한 부르심의 땅 성가정 마재성지 성당'), 다산 정약용 유적지·여유당과 같은 조안면 능내리 권역에 자리하고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미사·순례 시간]
주일 오전 9시 본당 미사, 주일 오전 11시 및 화~토요일 오전 11시 순례자 미사 (방문 전 의정부교구 또는 성지 공지사항으로 최신 시간을 확인하는 것을 권한다.)
[함께 둘러보기 좋은 곳]
정약용 유적지(여유당·다산문화관·정약용 선생 묘), 다산생태공원, 실학박물관이 도보 또는 짧은 차량 이동 거리에 모여 있어, 한나절 답사 코스로 묶어 걷기 좋다.
[교통]
경의중앙선 운길산역 또는 팔당역에서 마을버스·택시 이용, 자가용 이용 시 다산 유적지 주변 공영주차장 이용을 권한다. 상수원보호구역이자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지역 특성상 성지 내 시설 규모가 크지 않아, 단체 순례를 계획한다면 미리 의정부교구 성지순례국이나 성당 사무실에 문의해 두는 편이 좋다.
[함께 걸으면 좋은 순례길]
성지 경내에는 정약종·정철상 부자의 상과 성가정을 기리는 작은 동산이 조성되어 있어, 짧게는 30분 안팎으로도 조용히 걸으며 묵상하기 좋다. 앞서 소개한 여유당·정약용 선생 묘와 묶어 걸으면 다산 형제들의 생애를 한 자리에서 되짚어보는 반나절 코스가 완성된다.
글을 마치며…
정약종은 형제들이 유배지에서 학문으로 시대를 견디는 동안, 신앙을 지키다 형장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의 부인과 자녀들마저 대를 이어 순교하면서, 마재는 한 가문에서 성인 3명과 복자 2명이 나온 세계적으로도 드문 '성가정 성지'가 되었다. 오늘날 마재성지의 한옥 성당과 한복 성상은 이 땅에서, 이 땅의 언어로 신앙을 살아낸 이들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이다.
형제들의 운명이 이렇게 갈린 그해, 강진으로 유배를 떠난 정약용은 그곳에서 무려 18년을 보내며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같은 방대한 저작을 남긴다. 다음 글에서는 정약용이 왜, 그리고 어떻게 유배지에서 그 방대한 실학의 체계를 완성해 나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참고자료
디지털남양주문화대전(정약종, 마재성지), 위키백과(정약종·주교요지·황사영 백서), 나무위키(정약종), 우리역사넷(황사영 백서), 가톨릭평화신문·가톨릭신문·경인일보(마재성지 관련 보도), 의정부교구 마재성지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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