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 · A. 역사 인물 이야기 - 1
벼슬을 버리고 돌아온 자리,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
조심하고,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규장각의 젊은 학자가 어느 날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채에 이런 이름을 붙였습니다. '여유당(與猶堂)'. '여유'는 흔히 쓰는 '여유롭다'는 뜻이 아닙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살라'는 뜻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잘나가던 사람이 왜 하필 이런 이름을 골랐을까요? 그 답은 바로 남양주시 조안면 마재마을에 있습니다.

두물머리 옆 마재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마재마을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바로 옆에 자리한 마을로, 정약용의 5대조인 정시윤이 1694년 당쟁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 터를 잡은 뒤로 정씨 집안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해에는 공교롭게도 사도세자가 죽음을 맞는 사건이 있었고, 이 일로 아버지 정재원이 한동안 벼슬을 내려놓기도 했습니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벼슬길에 오른 다산 정약용
정약용은 178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789년 27세의 나이로 대과에 급제하면서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정조의 신임 아래 규장각에서 활동하며 학문적 역량을 마음껏 펼쳤고, 특히 수원 화성을 쌓을 때는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를 고안해 공사 기간을 크게 줄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정약용선생묘의 문화재청 공식 설명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정조가 수원 화성으로 능행할 때 한강에 배를 엮어 다리를 놓는 배다리(주교) 설치를 맡아 성공적으로 해낸 것도 이 무렵의 일로 전해집니다.
경기 암행어사로 목격한 백성의 삶
1794년 11월, 32세의 정약용은 경기 암행어사로 발탁되어 적성·마전·연천·삭녕 지역을 암행했습니다. 이 조사에서 그는 환곡을 함부로 나눠주고 재결을 가로챈 연천현감, 세금을 과도하게 물리고 뇌물을 받은 삭녕군수의 비리를 적발했습니다. 놋수저와 무쇠솥마저 빼앗기고 닷새에 한 번 밥을 짓는 백성들의 참상을 두 눈으로 목격한 이 경험은, 훗날 그가 유배지에서 지방관의 도리를 논한 《목민심서》를 써 내려가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벼슬을 버리고 돌아온 자리 조심하며 살겠다는 다짐, 여유당
승승장구하던 정약용의 삶은 정조가 세상을 떠난 1800년을 기점으로 크게 흔들립니다. 정조 서거 이후 그는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 마재로 돌아왔고, 이때 사랑채에 '여유당' 현판을 걸며 그 이유를 직접 '여유당기(與猶堂記)'라는 글로 남겼습니다. 그가 밝힌 전거는 《노자》 15장의 "예혜약동섭천 유혜약외사린(豫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곧 "겨울에 살얼음 낀 냇물을 건너듯 조심하고,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정약용은 원문의 '예(豫)' 대신 발음이 비슷하면서 뜻도 통하는 '여(與)'를 택해 당호를 지었는데, 여기에 우리말의 '여유롭다'는 어감까지 은근히 얹으려 한 것이 아니겠냐는 해석도 있습니다. 정치적 풍파를 온몸으로 겪어 낸 그가 스스로에게 건넨 다짐이었던 셈인데, 이 다짐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뼈아픈 현실이 되고 맙니다.
삼형제, 같은 강물에서 갈린 운명
정약용 집안과 천주교의 인연은 매형 이승훈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승훈은 1784년 베이징에서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인물로, 이 인연을 통해 정약용과 형제들도 자연스럽게 서학과 천주교를 접하게 됩니다. 이 인연은 1801년 신유박해에서 집안 전체를 뒤흔드는 비극으로 돌아옵니다. 셋째 형 정약종은 천주교 서적을 소지한 혐의로 붙잡혀 그해 4월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둘째 형 정약전은 모진 고문 끝에 배교를 약속했지만 전라도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로 유배지가 옮겨졌고, 그곳에서 《자산어보》를 남겼지만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약용 역시 배교를 약속하고 목숨은 건졌으나, 경상도 장기를 거쳐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지가 옮겨지면서 18년에 이르는 유배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같은 두물머리 강물을 보며 자란 삼형제가 이렇게 서로 다른 운명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18년의 유배, 방대한 저작을 남기다
역설적이게도 이 18년의 유배 기간은 정약용에게 있어 학문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였습니다. 그는 강진 다산초당에 머물며 지방 수령이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담은 《목민심서》, 국가 제도 개혁을 논한 《경세유표》, 형사 사건 처리의 지침을 담은 《흠흠신서》를 비롯해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습니다. 흔히 이 세 책을 묶어 '1표 2서'라고 부릅니다. 이 가운데 목민심서는 부임·율기·봉공·애민·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진황·해관의 12편으로 짜여 있고, 각 편이 다시 6조씩 나뉘어 모두 72조에 이르는 방대한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지방관의 청렴과 자기 수양을 강조하는 앞부분에서 시작해, 세금과 형벌 같은 실무를 다루고, 흉년 구제와 퇴임 절차로 마무리되는 구성입니다. 몸은 유배지에 묶여 있었지만, 마음은 늘 두고 온 고향 마재와 가족을 향해 있었기에 이토록 치열하게 책을 써 내려갔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목민심서는 오늘날에도 공직자의 자세를 돌아보게 하는 책으로 자주 언급되며, '다산'이라는 이름 자체가 청렴한 목민관을 가리키는 말처럼 쓰일 정도로 널리 회자되고 있습니다.
1818년, 마침내 유배가 풀린 정약용은 그리던 고향 마재로 돌아와 여유당에서 남은 생을 보내며 유배지에서 써 내려간 저작들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1836년,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일 아침 마현리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이름 붙인 그 집에서, 자신의 삶을 조용히 마무리한 셈입니다.
지금 남아 있는 여유당
지금 우리가 보는 여유당 건물은 정약용이 살던 당시의 원형 그대로는 아닙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원래 건물이 유실되었고, 이후 1986년에 사랑채와 안채로 이루어진 소박한 한옥의 모습으로 다시 지어졌습니다. 여유당 뒤편 나지막한 언덕에는 부인 풍산 홍씨와 합장된 정약용의 묘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 묘는 1972년 5월 4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지금, 여유당은 이렇게 가 볼 수 있습니다
여유당 바로 옆에는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저작과 유물을 모아 놓은 실학박물관이 있고, 팔당호를 끼고 걷는 다산생태공원은 산책하기 좋아 가족 단위 나들이객에게도 인기가 많습니다. 실제로 찾아가시려면 아래 정보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 위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1 (능내리)
• 운영시간: 화요일~일요일 오전 9시~오후 6시 (월요일 정기휴무, 1월 1일·명절 당일 휴무)
• 입장료: 무료
• 문의: 031-590-4242
• 주변 연계 코스: 실학박물관, 다산생태공원(팔당호 조망), 두물머리, 능내역 — 도보권 안에 모여 있어 한나절 답사 코스로 넉넉합니다.
• 참고: 자가용 이용 시 주차 공간이 넉넉한 편이며, 서울·경기 주요 지역에서 40분~1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매년 가을에는 남양주시가 여는 다산정약용문화제가 이 일대에서 열립니다.
글을 마치며 ...
여유당은 단순한 옛집이 아니라, 정조 시대 최고의 개혁가였던 정약용이 형제를 잃는 아픔과 18년의 유배를 겪고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던 삶의 무게가 담긴 공간입니다. '조심하고 경계하며 살라'는 당호의 다짐처럼, 그는 격변의 시대 속에서도 스스로를 다잡으며 방대한 저작을 남겼습니다. 200년이 더 지난 지금도 그가 스스로에게 건넨 그 다짐은 여전히 곱씹어볼 만한 울림을 줍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이번 글에서 잠시 스쳐 간 정약용의 형, 흑산도 유배 중 《자산어보》를 남긴 정약전의 삶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같은 신유박해로 흩어진 삼형제가 각자의 유배지에서 써 내려간 이야기들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함께 살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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