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역사·문화 이야기 · A. 역사 인물 이야기 - 2
형은 바다로, 아우는 강진으로 — 정약전과 자산어보
정약용이 강진에서 그 오랜 유배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왔을까. 뜻밖에도 그 답은 그가 유배 이후 단 한 번도 다시 만나지 못한 한 사람에게 있다. 바로 손암(巽庵) 정약전, 그의 둘째 형이다. 나주 율정점(밤남정)의 한 주막에서 눈물로 헤어진 두 형제는 그 뒤로 다시는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 편지로만 그리움을 나누었고, 형은 “어둡고 무섭다”고 느껴 이름조차 바꿔 부른 섬, 흑산도에서 조선에 없던 책 한 권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 책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 백과사전으로 꼽히는 『자산어보(玆山魚譜)』다. 남양주 마재마을에서 태어나 다산 정약용과 함께 자란 정약전은 어떤 삶을 살았기에, 형제는 끝내 다시 만나지 못했을까.

마재에서 자란 형제들, 그리고 갈라진 길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은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과 해남 윤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산 정약용보다 네 살 위였고, 맏형 정약현(1752~1821), 셋째 정약종(1760~1801)과 한 마을에서 함께 자랐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정씨 삼형제(정약현·정약종·정약전)와 정약용이 태어나고 자란 자리에 마재성지가 남아 있다. 다른 천주교 성지가 대개 순교지인 것과 달리,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신앙이 처음 싹튼 생가터라는 점에서 특별하며, 그래서 “한국 천주교의 요람”으로 불린다.
형제가 천주교와 처음 만난 순간은 1784년 봄, 마재 앞 한강 나루에서였다고 전해진다. 큰누이의 남편이자 매형인 이벽이 배 안에서 “천주는 사람에게 생혼과 각혼에 더해 영혼까지 주셨고, 그 영혼은 불멸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이 말에 깊은 인상을 받아 이후 서울 명례방(지금의 명동)을 오가며 이벽·이승훈 등과 교리 공부를 이어갔다고 알려진다. 이 만남을 계기로 삼형제의 인생행로는 크게 엇갈렸다. 맏형 정약현은 천주교와 거리를 두었고, 셋째 정약종은 『주교요지』를 지어 신앙을 널리 알리다 1801년 순교했으며, 정약전은 신앙을 지키면서도 관직에 나아가는 길을 택했다. 1790년 증광별시 병과에 급제한 그는 병조좌랑 등을 지내며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한 벗들과 서양의 학문을 폭넓게 접했다.
신유박해, 그리고 갈라진 유배길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약전은 관직에서 쫓겨나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그런데 그해 겨울, 조카사위 황사영이 신앙의 자유를 청하며 청나라에 밀서를 보내려 한 이른바 '황사영 백서 사건'이 드러나면서 정약전은 다시 조사를 받았고, 이듬해 유배지는 흑산도로 옮겨졌다. 두 형제는 나주 율정 삼거리의 한 주막에서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낸 뒤,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각자의 길을 떠났다. 이날의 이별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흑산도에 도착한 정약전은 섬 아이들을 위해 서당을 열었다. 사리마을에 세운 이 서당의 이름은 복성재(復性齋), '본성을 되찾는 집'이라는 뜻이다. 유배지에서도 학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으려던 마음이 담긴 이름이라는 풀이가 있다. 그는 이곳에서 섬 주민들과 어울리며 물고기와 해산물을 관찰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 대둔도 출신의 청년 장창대였다. 정약전은 그를 두고 “성품이 조용하고 정밀하여 초목과 조수 무엇이든 세심히 관찰하고 이치를 탐구한다”며 “옳고 뛰어난 사람”이라 높이 평가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두 사람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협업했는지는 사료가 소략해 오늘날까지도 학계와 대중문화(2021년 개봉작 <자산어보> 등)에서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으며, 이는 확정된 사실이라기보다 후대의 재구성에 가깝다는 점도 함께 알아 둘 만하다.
조선 최초의 해양생물 백과사전, 자산어보
정약전은 흑산도 근해에 사는 물고기와 조개, 해조류 등을 직접 관찰하고 채집해 이름과 형태, 습성, 맛, 쓰임새까지 정리했다. 수록된 종의 수는 자료마다 155종에서 226종까지 집계가 조금씩 엇갈리지만, 당시로서는 유례가 드문 방대한 규모였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이렇게 완성된 책이 1814년 무렵 마무리된 『자산어보』, 3권 1책이다. 1권은 비늘 있는 물고기(인류) 스무 갈래, 2권은 비늘 없는 물고기(무인류)와 껍질 있는 생물(개류), 3권은 바다벌레·바닷새·바다짐승·해조류 등 잡류를 다뤄, 오늘날 어류도감의 분류 방식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름을 정할 때 그는 '흑산(黑山)'이라는 두 글자가 너무 어둡고 무섭게 느껴진다며, 검다는 뜻은 그대로 지니면서 조금 더 부드러운 '玆(자)'자를 골라 '자산(玆山)'이라 이름 붙였다고 스스로 서문에 밝혔다. 이 때문에 훗날 '현산어보'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나와, 오늘날까지 독음을 둘러싼 논쟁이 학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동생 정약용도 이 작업에 훈수를 두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림은 자칫 사실과 어긋나기 쉬우니 차라리 글로 상세히 적는 편이 낫다”는 조언에 따라 정약전은 그림 없이 정밀한 글만으로 어보를 완성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밖에도 정약전은 유배 중 흑산도 인근에서 표류 끝에 여러 나라를 거쳐 돌아온 문순득의 체험담을 듣고 기록한 『표해시말(漂海始末)』을 남기기도 했다.
정약전은 물고기 연구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 성리학, 그중에서도 주역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다. 유배지에서도 『자산역간(玆山易柬)』과 『논어난(論語難)』 등을 지어 경학 연구를 이어갔고, 동생 정약용과는 조석(潮汐, 밀물과 썰물)이 일어나는 원인처럼 자연현상을 두고도 편지로 활발히 토론했다고 전해진다. 정약용이 훗날 회고하기를, 형의 견해를 따라 다시 살펴보니 “의심났던 글과 서로 맞지 않던 수가 모두 신기하게 들어맞았다”고 할 정도로, 두 사람의 학문적 교감은 유배라는 물리적 거리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젊은 시절 정조가 그를 두고 “준걸한 풍채”라 칭찬했다는 일화처럼, 정약전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눈앞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고드는 학자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끝내 이루지 못한 재회
16년에 이르는 유배 생활 동안 형제는 오직 편지로만 서로의 안부와 학문을 나누었다. 정약용이 먼저 풀려날 조짐이 보이자, 정약전은 두 사람이 조금이라도 가까이 지낼 수 있도록 흑산도 본섬에서 육지에 더 가까운 우이도로 거처를 옮기고 동생을 기다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약용의 석방 소식은 쉽게 전해지지 않았고, 두 형제는 끝내 다시 만나지 못했다. 정약전은 1816년 6월 6일, 유배 16년 만에 우이도에서 눈을 감았다. 부고를 들은 정약용은 “나를 알아주던 이가 이제 없으니, 지기(知己)를 잃었다”며 통곡했다고 전해지며, 훗날 형을 위한 글을 손수 지어 오래도록 그리움을 남겼다.
지금 가볼 수 있는 정보
정약전을 단독으로 기리는 유적은 남양주에 따로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태어나고 자란 자리는 지금도 찾아갈 수 있다. 남양주시 조안면에 자리한 마재성지가 그곳으로, 정약현·정약종·정약전·정약용 네 형제가 태어난 생가터이자 이들이 처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자리다. 폐역이 된 능내역에서 걸어서 2~3분이면 닿을 만큼 가깝고, 한옥으로 지은 성당과 한복을 입은 예수상·성모상이 눈길을 끈다. 순례자를 위한 평일 오전 11시 미사와 주일 오전 9시·11시 미사가 봉헌되고 있으나, 시간은 방문 전 마재성지 측에 다시 확인하는 편을 권한다. 걸어서 5분 남짓 거리인 다산유적지(여유당·정약용 생가)까지 함께 둘러보면 삼형제의 삶을 한 자리에서 가늠해 볼 수 있다. 흑산도 현지에는 정약전이 세상을 뜬 우이도와 서당을 열었던 사리마을에 그를 기리는 전시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언젠가 발걸음을 더 넓혀 볼 만하다.
글을 마치며..
정약전은 남양주 마재에서 나고 자라 형제들과 신앙과 학문을 나누었지만, 신유박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동생과는 정반대의 바다, 흑산도로 흘러갔다. 그리고 그 유배지에서 그는 당대 조선의 지식인이 좀처럼 눈여겨보지 않던 바다 생물들을 관찰하고 기록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자산어보라는 독보적인 성과를 남겼다. 형제는 살아서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정약용이 강진에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써 내려갈 수 있었던 데에는 바다 건너에서 편지로 마음을 나눈 형의 존재가 적지 않은 힘이 되었을 것이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신유박해로 갈라진 삼형제 중 순교의 길을 택한 셋째, 정약종과 마재성지의 이야기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본다.
참고자료
· 디지털남양주문화대전 — 정약전, 마재성지 항목 (namyangju.grandculture.net)
· 국가유산청·국가유산포털, 우리역사넷 — 자산어보(玆山魚譜) 해제
· 위키백과 — 정약전, 자산어보 항목 / 나무위키 — 정약전 항목
· 천지일보(마재성지 탐방), 경인일보(마재성지 성당), 우리문화신문(형제 우애), 아주경제(천주교 만남 일화), 서울경제(자산어보 칼럼) 등 언론기사 교차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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